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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리뷰

[책 리뷰] 최소한의 한국사

by ▶ Carpe diem ◀ 2024. 4. 30.

얼마전에 "최소한의 한국사"라는 책을 추천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최소한의 한국사

책의 제목처럼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내용을 다루면서 흐름에 맞춰 쉽게 풀어 이야기해주는 책이라 어렵지 않게 읽혔지만, 읽는 중간중간 생각을 하기 위해 책을 잠시 손에서 놓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한국사
최소한의 한국사

 

 

책을 읽으면서 잘 몰랐던 근대사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나마 알게 되어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고, 역사 속 선조들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NCND (Neither Confirm Nor Deny, 어느 쪽도 확인하거나 부인하지 않음) 전략은 고려가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고려는 주변 강국들 관계에서 때로는 균형을 잡으며, 때로는 한 쪽에 기울어 정치적 생존과 최대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현대 한국 외교에서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비슷한 유연성과 전략적 모호성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고려시대의 NCND 와 유사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 속의 여러 사건들을 보며 배우는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전기(1392-1506)에서 중기(1506-1592)로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사화로 사림파의 세력이 약화된 내용은 나오는데, 훈구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세력이 약해졌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조선 시대의 훈구파는 초기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세력입니다. 훈구(勳舊)라는 용어는 '공(功)을 세운 구(舊)신하'라는 의미로, 주로 개국 공신과 그 후손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바탕으로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누렸습니다.

 

훈구파

훈구파는 조선 왕조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건국 공신으로서의 지위를 통해 중앙 정부의 주요 직책을 독점하며, 왕권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훈구파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득을 통해 국가의 주류 계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림과의 관계

조선 중기에 이르러 훈구파는 사림파와 대립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림파는 주로 지방의 유학자 출신으로, 유교적 이상과 도덕적 정치를 강조했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가 점유하고 있던 중앙 정치의 폐쇄성과 부패를 비판하며, 정치적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사림파의 정치 참여를 억제하려 했습니다. 사화(士禍)는 조선 시대에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사림(士林, 선비 계층)"에게 발생한 "화(禍, 재앙)"를 뜻 합니다.

 

주요 사화 사건

  • 문종조 사화 (1498):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성장하면서 기존의 세력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은 엄격한 유교적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조광조가 사사되고 많은 동지들이 숙청되었습니다.
  • 기묘사화 (1519): 조광조 사화 후에도 그의 개혁 정책을 계속하려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사화입니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많은 사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습니다.
  • 을사사화 (1545): 조선 중기에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발생한 숙청으로, 이는 당시 세력관계의 변동을 반영하며 많은 사림파 인사가 피해를 보았습니다.
  • 갑자사화 (1589): 선조 때 발생한 사화로, 선조의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왕실과 사림파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건 역시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화는 조선 시대 정치사에서 중대한 사건들로, 이는 종종 정치적 견해나 정책 방향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폭력적 숙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숙청은 정치적 안정성을 저해하고, 사회적 불안과 불신을 조성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유학자들의 사상과 활동을 억압하고, 조선 사회의 지식인 계층에 대한 두려움과 주의를 촉진시켰습니다.

 

사화의 결과

사화는 종종 단기적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과 불신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숙청된 세력의 지지자들이 복수를 꾀하거나 새로운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조선 왕조 내부의 지속적인 불안 요소로 작용했고, 결국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변화하게 됩니다.

  • 조선 전기 (1392-1506): 조선 전기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1392년부터 연산군이 퇴위하는 1506년까지를 일컫습니다. 이 시기에는 훈구파가 주로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훈구파는 초기 조선의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개국 공신과 그 후손들이 국가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조선 중기 (1506-1592): 조선 중기는 연산군의 폐위와 중종의 즉위를 시작으로 하며, 이 시기에 사림파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중종반정을 계기로 사림파의 많은 인사들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고, 이들은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며 점차 주도권을 잡아갑니다. 특히, 사림파는 유교적 이상과 도덕적 정치를 강조하며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